영상번역에 대해 내가 아는 것들(게스트 포스트)

영상번역에 대해 제가 문외한이어서 영상 번역을 잘 해 오시는 분께 대신 글을 좀 써 달라고 부탁드렸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사진과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아래는 애니 조 님께서 쓰신 “영상 번역에 대해 내가 아는 것들”이라는 글입니다.

 

– 아래 –

영상번역에 대해 내가 아는 것들

애니 조
애니 조

 

 

 

영상번역에 대한 글을 의뢰 받은 건 처음입니다. 사실 경력이 그리 많지도 않고,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 미드나 영화를 번역한 인기 영상번역가도 아니기 때문이죠. 인터넷상에 부지런히 검색하면 영상번역에 관한 웬만한 정보는 다 나옵니다. ‘영상번역이란 무엇인가?’ 이런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평범한 4년차 영상번역가로서 그저 영상번역에 대해 제가 아는 것들과 개인적인 경험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써봤습니다.

 

Q. 언제 영상번역을 시작했나?

문서가 아닌 영상물을 처음 번역한 건 2006년, 당시 몇 달치 월급이 밀릴 정도로 경영상태가 안 좋았던 직장을 그만둔 상황이었습니다. 당장 생계가 위태로운 시기에 우연한 기회로 어느 지방자치단체에서 주최한 작은 국제영화제의 해외코디네이터로 일했습니다. 비전문가로 된 영화제팀에서 해외게스트들의 숙박, 항공, 영어 통·번역부터 온갖 잡다한 일을 맡아서 했는데, 나중에 본선작으로 상영될 단편영화 대사를 전부 번역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번역료를 받았지만 요즘 말로 하면 ‘열정페이’ 수준이었습니다. 낮에는 다른 업무를 보고, 밤에는 사무실에 혼자 남아 단편영화들을 여러 날 밤새며 번역해야 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제가 하던 일을 세 명이 나눠서 했다고 하는 얘길 들었을 정도로 일이 많았습니다. 당시엔 온몸을 두들겨 맞은 듯이 피곤했지만 홀로 조용한 방에서 온전히 영상에 몰입하며 번역하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평소에도 영화를 좋아해서 시간 나면 혼자 국내 크고 작은 영화제를 찾아 다녔고, 좋은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도 찾아서 보는 편이라, 색다른 외국영화들을 보며 번역하는 일이 참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몇 년 간은 TV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구성작가로 밥벌이를 했고, 영상번역은 그저 책상머리에 ‘영상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한 문장만 적어서 붙여놓았던 ‘꿈’이었습니다. 그러다 본업을 번역으로 하게 된 건 2012년 여름입니다. 방송국에서 잦은 밤샘과 피로로 번아웃 될 즈음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때가 방송 일을 하는 동시에 같은 방송국 특집방송팀의 영상번역도 잠시 했던 때라서 하고 싶었던 일은 영상번역 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Q. 어떤 영상을 번역했나?

처음엔 작가로 일했던 방송의 해외 촬영본을 번역했습니다. 한국의 방송시스템은 한 마디로 열악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몇 달씩 취재할 분량을 한국에선 단 몇 주에 끝낸다는 말도 있습니다. 항상 할 일은 많은데 시간과 제작비는 빠듯해서 번역비 역시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급할 땐 제가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방송이 ‘죽을 때’(결방이 되면 작가들은 수입이 제로입니다.) 아르바이트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일한 영상번역물은 대부분 무대본의 방송용 다큐멘터리입니다. 해외에서 촬영을 해오면 원본 영상을 받아서 보고 타임코드를 입력하며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제작진들이 보고 편집한 다음, 번역한 내용을 자막으로 내보내는 거죠. 제작일정이 촉박하기 때문에 혼자 한 것보다는 다른 번역가분들과 공동으로 한 것도 많습니다. 그 동안 했던 프로그램 종류만 세어보면 50여 편 정도입니다. 방송물을 많이 할 수 있었던 건 작가로 6년 이상 일했기 때문에 제작진들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방송의 성격에 따라 어떤 문장, 어떤 번역이 필요한 지 잘 파악하고 있었던 덕분인 것 같습니다. 어떤 작가분께서는 번역이 깔끔해서 자막 뽑기가 편하다고 칭찬해주신 기억이 납니다. 그 외에는 강연, 세미나 및 국제행사 관련 영상, 독립영화, 국내단편영화가 있습니다.

 

Q. 영상번역 일감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 드리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면 ‘인맥’입니다. 한국의 프리랜서들은 대부분 인맥이 중요합니다. 저는 운 좋게 방송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엔 아는 작가, 피디와 일을 하고, 점점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서 제 전화번호가 돌고 돌아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번에 000다큐 번역했던 분이시죠?” 라고 연락이 와서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되는 식이었습니다. 얼굴 한 번 못 본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단 한번도 페이가 지불되지 않거나, 얘기한 날보다 늦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내 독립영화 감독들이 많이 방문하는 사이트에 제 프로필을 올려놓고 연결되어 단편영화들도 번역했고, 번역 구인/구직 글이 많이 올라오는 인터넷 까페를 통해서도 일을 했습니다. 그 밖에는 문서번역을 했던 곳에서 이번에는 영상번역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내에 수많은 번역회사들이 있기 때문에 번역 테스트를 보고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방법도 있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페이가 터무니없이 낮아서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회사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기존에 받았던 금액이 있기 때문에 그 이하로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영상은?

올 초 방영됐던 다큐멘터리 SBS스페셜 ‘쇼에게 세상을 묻다’ 입니다. 작년 연말, 한국이 아닌 페루에서 한창 향수병을 앓던 시기에 때맞춰 제작진들이 연락을 주었습니다. 하루에 반나절 밖에 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인터넷 속도도 느리고, 지구 반대편이라 시차도 다른데 고맙게도 제 사정을 배려해주어 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방송 일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다양한 나라의 방송환경과 문화를 다룬 내용이 무척 신선하고 재미있게 취재해서 일하는 내내 정말 즐겁게 했습니다. 특히, 방송이 나간 후 주변 지인들과 시청자들의 반응도 꽤 좋았던 프로그램이라 뿌듯했습니다.

 

Q. 영어 공부는 어떻게 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도 수천 수만 가지가 나올 수 있습니다. 제 경우 어릴 때부터 새벽에 ‘굿모닝팝스’를 매일 듣고, 동호회에 최연소 회원으로 출석할 만큼 영어를 좋아했고, 초등학교 때는 하루에 4-5편씩 비디오를 빌려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단순히 외국어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물론 입시위주의 교육이었지만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과목이 전체과목 중 8-10개 정도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국어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호주에서 6개월 영어 연수를 한 뒤, 2년 간 현지에서 전문대학을 다녔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남들 다 하는 토익 공부를 했고, 틈틈이 원어민 회화 학원도 다녔습니다. 외국 영화보기와 미드보기는 일상이었습니다.

 

Q. 영상번역가에게 필요한 것은?

작가나 문서번역가에게 요구되는 자질과도 비슷한 것 같은데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외국어실력 + 한국어실력 + 지적 호기심 + 열정 + 성실함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쓰고 보니 많은 것 같은데 사실입니다. 다큐멘터리의 경우, 전문용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상을 받기 전 의뢰인에게 미리 어떤 주제인지 물어보고 관련된 지식을 공부합니다. 책과 인터넷을 뒤져보고, 번역하면서도 최대한 보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해야 합니다. 문장을 다 쓴 후에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영상번역은 구어체이기 때문에 어색한 부분에서는 입에 잘 붙지 않습니다. 읽었을 때 자연스럽도록 문장을 다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또한 기본적으로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외국어로 된 영상물을 좋아해야 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일이 불규칙적이라 주7일 일할 때도 있었고, 주0일 일할 때도 있었습니다. 대신 일이 없을 때는 보고 싶던 다큐멘터리나 미드를 한꺼번에 몰아서 보거나, 혼자 영화를 봤습니다. 물론 영어공부와 글쓰기 연습도 하고, 번역과 관련된 책을 사고, 나중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번역과 관련된 모든 책을 다 대출해서 읽었습니다. 그 밖에 저는 해당 안 되지만 영상번역에 쓰이는 소프트웨어를 잘 다룰 줄 알면 효율성과 작업량 측면에서 훨씬 유리할 것입니다. 국내 영상번역가들이 많이 쓰는 프로그램은 미디어트랜스, ATS라고 알고 있습니다.

 

 

현직 영상번역가 추천 블로그:

이미도 번역가의 메이드 인 할리우드 http://blog.naver.com/midomiho

함혜숙 번역가의 프리윌리의 영상번역 작업실 http://blog.naver.com/hamsuk77

황석희 번역가의 작은 평화의 영상번역 이야기 http://subtitler.net/blog

 

 

영상번역 커뮤니티:

현직 영상번역가들의 커뮤니티 : 두 줄의 승부사  http://cafe.daum.net/subtitlers

영상번역가 지망생들을 위한 커뮤니티 : 주간번역가 http://cafe.naver.com/transweekly

 

 

관련도서:

책장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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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훈, 미드 & 스크린 영어회화 표현사전

함혜숙, 영상번역가로 먹고 살기

박찬순, 그때 번역이 내게로 왔다

이희재, 번역의 탄생

권남희, 번역에 살고 죽고

조원미, 번역, 이럴 땐 이렇게

 

* 질문이나 작업 의뢰 등은 아래 연락처를 통해 애니 조에게 직접 해 주시기 바랍니다.

애니 조의 트위터: www.twitter.com/winnerannie
애니 조의 블로그: http://blog.yes24.com/winnerjo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4 Comments

  1. 안녕하세요^^ 저는 번역가를 꿈꾸는 한국의 대학생입니다.
    주간번역가라는 네이버 카페를 통해 들어왔는데요.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정독했는데 글들이 참 알차고 배울 것이 많네요.
    지금은 홀로 영어공부, 번역공부 하느라 애쓰지만 나중엔 선생님처럼 좋은 번역가가 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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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