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 tool 시장에 대한 이해(2): TM은 번역가의 생명줄

지난 시간에는 CAT tool 시장의 큰 그림과 트라도스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온라인 기반 CAT tool에 대해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온라인 기반 CAT tool은 사실 대단한 것입니다.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부분은, 온라인 기반 CAT tool은 번역가가 아닌 Agency가 그것을 소유한다는 점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비싼 기계를 사서 공장에 비치하고, 그것을 어떻게 쓰는지를 파악하고 매뉴얼을 만듭니다. 작업자들은 아침마다 거기로 출근해서 그 기계 주변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죠?

 

 

번역가가 생산을 책임지는 독립 사업가에서 어째 다시 종업원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입니다. 물론 실제로 번역가가 출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 예컨대 독일에 있는 어떤 호스트로 로그인을 하면 바로 그 CAT tool이 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이런 방식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긴 합니다. 가끔 그런 상상을 해 보곤 하죠. 인터넷으로 온 세상이 다 연결되어서 어디서든 작은 장치로 연결만 하면 곧바로 거기서 번역을 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 online-based CAT tool은 그런 세상의 모습을 일부 보여 주긴 합니다. 극단적으로는 스마트폰 하나만 있어도 산에 올라가 바위 위에 누워서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내 기기에 CAT tool이 깔려 있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 그저(무선) 인터넷으로 연결만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 CAT tool에 모든 기능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또 다른 매력은 번역가가 적게는 몇백 불, 많게는 천 불이 넘는 돈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이 보편적으로 정착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사긴 사야 해요.) 위와 같은 이유 때문에 온라인 플랫폼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XTM이라는 CAT tool입니다. 호스팅 회사에 따라 조금 불안정할 때도 있는데 그런대로 쓸 만합니다. 그 외에도 이것과 유사한 방식의 CAT tool들이 계속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제가 좀 해보니 XTM과 그리 다르지 않더군요(장점과 단점 모두에서).

 

그런데 이런 방식을 저는 한 마디로 싫어합니다. 이 부분은 TM을 누가 소유하는가 하는 점과 관련하여 따로 포스팅을 이미 하기도 했습니다만, 여기서 한 번 더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 이 방식은 번역 작업의 주도권을 번역가가 아닌 에이전시가 가져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에이전시는 번역가의 마케팅 부서였는데 갑자기 번역가가 에이전시의 종업원으로 전락해서, 이런 저런지시를 받고, 사용 요령을 배우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 번역 작업의 통제권이 넘어가면 에이전시에게 넘어가면 번역가는 불편합니다. Segment를 통합하거나 나누는 작업 등은 오직 두 언어를 모두 아는 번역가만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항들인데, 온라인 Cat tool들은 그런 자유를 거의 허용하지 않고 있지요. TM에 대해서도 내가 만들지 않은 TM을 사용하도록 하니까 그것도 남의 옷 입는 것 같이 불편하고요.
  • 가장 중요한 점은 역시 TM의 소유권 문제입니다. 번역가에게 시간이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번역을 오래 하면 번역가의 머릿속에서 번역 작업을 할 수 있는 intellectual muscle 같은 것이 강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컴퓨터에도 외장 기억장치를 많이 쓰지 않습니까? 심지어 컴퓨터도 그렇게 하는데 사람인 번역가가 어떻게 그 방대한 양의 정보와 지식을 다 머릿속에만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은 기억에 관한 한 컴퓨터와 아예 게임이 안됩니다. 기억에 관한 한 컴퓨터에게 아예 외주를 주는 것이 현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여튼, 본론으로 돌아오면, 번역가는 한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그 TM을 자신의 컴퓨터에 축적함으로써 같은 혹은 유사한 어구나 문장을 다시 한 번 번역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습니다. 이것은 파트타임으로 조금씩 번역을 하는 분은 몰라도 번역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번역가로서의 관록이 쌓일수록 번역을 잘 해 나가는 이유 중에 아주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런 TM입니다. TM을 번역가가 소유해야 시간이 지나갈수록 번역가의 효율이 점점 더 향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번역가들이 온라인 CAT tool을 수용하고 그런 방식으로 일을 장기적으로 해 나가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약 삼 년 동안 많은 일을 같이 했던 에이전시와 위와 같은 이유로 몇 년 전에 결별을 했습니다. 물론 서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쿨’하게 헤어졌어요. 서로 마음도 잘 통하고 프로젝트들도 늘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저는 TM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 에이전시는 XTM이라는 CAT tool 시스템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런 번역가의 입장과 저항이 전달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일부(현명한) 에이전시들은 번역가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제가 지금 관계를 맺고 있는 한 회사는 자기네가 XTM을 사용하는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지만 제게는 저 자신의 CAT tool을 사용해서 작업을 하도록 허락합니다. 그래서 저는 TM을 축적해 나갈 수가 있지요. 작업이 끝나면 번역 파일과 더불어 tmx 파일을 보내 줍니다. 그걸로 그 에이전시에서 뭐 번역 작업을 할 일은 없지만, 세그먼트 반복율을 계산하는데 쓰지요. (이것이 뭔지는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습니다. 좀 중요한 것이라서요.)

 

결론적으로, 저는 부담이 좀 되더라도 자신이 맘에 드는 CAT tool을 구입하여 사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Bryan
Bryan

브라이언은 의료분야에서 한영번역을 하는 번역가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둘이 삽니다. 여행과 독서와 음악과 커피를 좋아합니다.

3 Comments

  1. 브라이언 선생님,

    귀중한 정보 감사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2.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포스팅덕에 CAT tool이 무엇인지 알았는데요
    이제막 번역을 시작하려는 저같은 새내기는 무턱대고
    살 수도 없는 일이고, 대충 어떤 프로그램인지만 아는 상황에서
    사용법이나 생김새, 이런거를 모르는데..
    하지만 회사 채용공고에는 cat tool 경력자들만 찾고있고;;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ㅜㅜ

    • CAT tool은 어차피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니 번역을 전문적으로 할 생각이면 처음부터 열심히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가격이 부담스러우면 trial version 으로 어느 정도는 연습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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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번역가